Mira Kim

<wild animal> digital Photo and frame, 2016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 김미라의 작품세계

류병학 미술평론가

“뉴욕 레지던시 기간 동안 주변의 자연 환경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며 만든 영상작품을 토대로, 완주와 서울을 오가며 동물을 보는 인간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과 오브제 작업을 전시할 계획이다. 영상은 게임 속 화면처럼 구성, 가벼운 오락성을 강조하여 동물에서 멀어진 거리감을 표현할 것이다. 공산품을 재조합하여 망원경을 점차 더욱 문화적으로 상징적인 맥락을 표현하는 오브제로 조형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영상과 함께 오브제 및 드로잉을 공간에 설치할 것이다. 아트플러그의 전시공간이 다양한 점을 활용하여 여러 공간에 설치적 실험을 해 볼 예정이다.”
- 김미라의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 작품계획서 중에서
김미라의 ‘엔터테이너’는 복합문화지구 누에 레지던시 결과보고전 <상전벽해(桑田碧海)>에 전시될 작품이다. <상전벽해>는 12월 13일 아트플러그 성북에서 오픈할 예정이다. 필자는 그 결과보고전을 앞두고 지난 11월 18일 복합문화지구 누에 레지던시를 찾아 김미라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작품계획에 관해 들었다. 그녀는 누에 레지던시 단기(4개월) 입주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레지던시 입주와 함께 입주작가들과 함께 단체로 유럽미술투어를 갔다 왔다. 따라서 그녀는 신작할 시간이 넉넉지 않을 것 같다. 때문에 필자는 미완의 신작에 대해 마치 예언자의 목소리로 언급하기 보다는 신작과 관련된 기존 작품들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신작이 이전 작품들 중 뉴욕 레지던시 기간 동안 주변의 자연 환경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며 만든 영상작품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김미라가 뉴욕 리그 레지던시(The league residency at Vyt) 기간 동안 주변의 자연 환경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며 만든 영상작품 ‘시녀들(The maids)’(2016)을 보도록 하자. 그녀는 뉴욕의 스파킬(sparkill) 지역에 있는 인적이 드문 산의 숲속에 망원경과 거울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숲속에 설치된 망원경과 거울이 심상치 않다. 그렇다! 그것들은 김미라가 직접 제작한 일종의 ‘오브제’ 작업이다.
김미라는 망원경을 주변에 버려진 pvc 파이프들(pvc pipes)에 돋보기(magnifying glass)를 접목시켜 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망원경을 의자 위에 카드보드 파이프들(cardboard pipes)를 접목시켜 설치해 놓았다. 따라서 관객은 그 망원경의 파이프를 앞/뒤로 거리간격을 조절할 수 있으며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볼 수 있다. 그녀는 그 망원경을 ‘야생동물보기’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그 망원경은 야생동물을 관찰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망원경은 지나치게 길고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높이도 높아서 사실 야생동물을 관찰하는데 불편할 것 같다. 와이? 왜 그녀는 불편한 망원경을 제작한 것일까?
자, 이번에는 거울을 보도록 하자. 타원형 거울에 무엇인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 거울에 부착된 것은 ‘침묵은 금이요, 덕트 테이프는 은이다(silent is gold, duct tape is silver)’라는 말까지 생긴 덕트 테이프(Duct Tape)이다. 덕트 테이프가 그만큼 강력한 접착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께다. 물론 우리에게는 청테이프가 있지만. 그런데 그 거울을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면, 그 거울에 덕트 테이프뿐만 아니라 종이도 부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그녀는 덕트 테이프와 종이를 타원형의 거울에 콜라주해 놓았다. 이를테면 그녀는 덕트 테이프와 종이를 각종 패턴의 자연이미지들로 오려내어 타원형 거울에 콜라주해 놓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거울에 각목들을 접목시켜 세워놓았다. 따라서 컬러풀한 덕 테이프와 종이로 콜라주 된 각종 패턴의 자연이미지들은 거울에 비친 숲속 풍경과 함께 뒤섞여 묘한 풍경으로 나타난다. 김미라는 이 환상적인 거울을 ‘중재인(A mediator)’으로 불렀다. 중재인? 그것이 무엇을 중재한다는 것일까?
김미라는 망원경과 거울이 설치되어 있는 숲속 풍경을 영상으로 담았다. 그 영상작품이 다름아닌 ‘시녀들’이다. 시녀들? 도대체 어떤 영상이 담긴 작품이기에 작품명을 ‘시녀들’로 명명한 것일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필자는 우선 영상작품 ‘시녀들’을 간략하게나마 이곳에 언급해 보겠다.
망원경과 거울이 설치된 숲속에 사슴들이 등장한다. 그 사슴들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 김미라가 설치한 사물이 있는 곳을 주시한다. 그 사슴은 한참 동안 그 사물이 있는 곳을 주시하다가 이동한다. 그런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 후 그 사슴은 다시 사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진다. 아니다! 그 사슴은 망원경과 거울이 있는 사물이 아니라 그 장면을 촬영하는 곳(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슴은 한동안 (화면 밖의) ‘관객’을 향을 시선을 던지다 이내 다른 사슴들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사라진다. 다음 장면에서 다람쥐가 출현하고, 곧이어 새들이 날아간다. 그 다음 장면에서 칠면조들이 등장한다. 칠면조들 중에서 한 마리가 잠시 그 사물을 보더니 이내 사라진다. 다시 칠면조 한 마리가 등장한다. 그 칠면조는 망원경도 아니고 거울도 아닌 화면 밖에 위치한 카메라를 향해 바라보다가 이내 화면에서 사라진다. 또 다시 여러 칠면조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새소리만 들린다. 밤이 찾아온다. 암전(暗轉).
동물들이 숲속에 설치된 망원경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보기에는 턱없이 높다. 물론 사람 역시 그 망원경을 통해 야생동물들을 관찰하기에도 높은 편이다. 따라서 그 망원경은 ‘본다’는 기능보다는 ‘시선’을 상징한다. 그 망원경에 관해 김미라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의 작업에서 망원경은 기능보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상징적 오브제로 사용된다. 즉 보고자하는 대상과 보는 주체 간의 거리감을 오히려 드러내 강조하는 것인데, 게다가 재활용 된 자재들이 사물에 의존하는 행위를 어딘가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실제로 망원경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오브제는 영상작업에서 대상을 보는 용도로 쓰이지 않고,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망원경이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다! 영상작품 ‘시녀들’에서 그 망원경은 정면, 즉 관객을 향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그 관객의 위치는 다름아닌 망원경이 설치된 숲속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설치된 곳이 아닌가. 따라서 관객의 위치는 카메라의 앞, 즉 망원경과 카메라 사이가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는다. 마치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시녀들(Las menias)’에서 거울에 비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여왕 앞에 관객이 그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머시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그려진 거울은 김미라의 ‘시녀들’에 등장하는 망원경이 아니라 거울에 비교해야만 한다고요? 조타! 김미라의 ‘시녀들’에 등장하는 거울을 보도록 하자. 그 거울 역시 망원경과 마주보는 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향하고 있다. 그 거울은 각종 패턴의 자연이미지들과 숲속의 풍경을 반영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육백만불 사나이의 눈’을 빌려 본다면, 저 멀리 카메라도 비추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카메라 앞에 관객은 부재한다. 왜냐하면 응시(gaze)는 시선(eye)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소멸되기 때문이다.
시선은 주체의 것인 반면, 응시는 대상의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은 일치할 수 없는 셈이다. 말하자면 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라캉(Jacques Lacan)은 응시와 시선을 이율배반적 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왜 김미라가 그녀의 영상작품 제목을 ‘시녀들’로 명명한 것인지 아시겠죠? 이를테면 그녀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그려진 그림 속 화가의 시선과 거울을 숲속의 망원경과 거울로 대체했다고 말이다. 물론 김미라의 ‘시녀들’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등장하는 ‘박제된’ 인물들과 달리 움직인다. 그렇다! 그 동물들은 나타났다-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녀가 ‘시녀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영상 작업에서 망원경과 거울을 사용하여, 본다는 행위에 놓인 주체와 타자를 전복시키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적 시각에 대한 반환을 시도한다. 시점의 반환을 위한 또 하나의 장치는 각종 패턴의 자연이미지를 콜라주한 거울이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일방적이고 관습적 시점을 전복시켜보고자 하였다.”
김미라의 신작 ‘엔터테이너’는 영상작품 ‘시녀들’을 토대로, 완주와 서울을 오가며 동물을 보는 인간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과 오브제 작업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녀는 영상을 ‘게임 속 화면처럼 구성, 가벼운 오락성을 강조하여 동물에서 멀어진 거리감을 표현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작가는 필자에게 영상작품 ‘엔터테이너’ 미완의 편집본을 이멜로 보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완’은 디테일에 관한 사항이다. 따라서 전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녀가 필자에게 보낸 편집본 내용은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이곳에 우선 그녀의 영상작품 ‘엔터테이너’ 편집본을 간략하게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김미라는 뒤꿈치를 들고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다. 실내공간의 백색의 둥근 등이 등장한다. 등이 분리되면서 그 위에 벌레들이 출현한다. 물론 그 벌레들은 실제의 벌레들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량생산된 장난감벌레들이다. 검정 바탕에 타이틀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가 나온다. 자동차로 군포송정을 지나는 풍경(아파트단지와 식수된 나무들을 지나치는 풍경), 인형뽑기 가게인 뽑겟몬 풍경(각종 동물인형들이 유리상자 안에 있다), 한밤중에 숲속에 나타난 사슴들을 불빛으로 비추는 장면, 그 장면이 ‘시녀들’의 타원형 거울에 겹쳐진 풍경, 사슴농장의 풍경이 타원형 안에 있고, 그것이 자동차 운전하는 모습, 자동차 안에서 본 아파트단지의 풍경, ‘시녀들’의 타원형 거울, 실내의 욕실과 콜라주 된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시녀들’에서 사슴이 등장하는 장면과 새를 수놓는 재봉질 장면이 세 차례 반복된다,
공원에서 동물 탈인형을 쓴 사람이 공원의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장면, ‘시녀들’에서 사슴이 등장하는 장면, 동물장난감들이 등장, ‘시녀들’에서 사슴이 등장하는 장면, 애완동물 샵 풍경, ‘시녀들’에서 사슴이 등장하는 장면, 자동차 안에서 본 아파트단지의 풍경, 뽑겟몬 풍경에 포장된 육류 콜라주, 자동차 안에서 본 아파트단지의 풍경, ‘시녀들’에서 칠면조가 등장하는 장면, 칠면조가 주차된 자동차를 부리로 쪼는 장면, 도시의 행단보도 앞에서 정차하는 자동차(행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칠면조가 주차된 자동차를 부리로 쪼는 또 다른 장면, 잠수교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시녀들’의 숲속 풍경, 도시의 풍경, ‘시녀들’의 숲속 풍경, 도시의 밤풍경, ‘시녀들’의 숲속 밤풍경, 천천히 주행하는 자동차 안에서 본 도로의 밤풍경, 암전(暗轉).
김미라의 신작 영상작품 ‘엔터테이너’는 작가가 직접 숲속에서 촬영한 영상작품 ‘시녀들’에서 자연의 야생동물들과 완주와 서울을 오가며 촬영한 공장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동물(인형, 장난감)을 편집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도시에서 자연의 야생동물을 보기 쉽지 않다. 물론 최근 도시로 난입한 멧돼지도 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야생동물은 어느 면에서 공장에서 만들어진 인공적 동물들(인형,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우리는 자연의 야생동물을 다양한 대체물, 즉 사진이나 대중매체 그리고 대량생산품을 통해 경험한다. 문득 라깡의 ‘욕망이론’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우리의 욕망은 대체물에서 다른 대체물로 옮겨갈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내가 진정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하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욕망은 상징계 안에서 ‘빈 구멍’처럼 결여된 실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계 안의 ‘구멍(결여)’를 메우려는 것이 바로 욕망인 셈이다.
그 점은 아티스트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아티스트는 자신이 표현한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작품(욕망의 대상)을 생산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티스트의 방황은 현실에서 늘 ‘결여’된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불가능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 바로 예술을 생산해내는 아티스트의 ‘힘(욕망)’이라는 점이다.
그 점은 아티스트와 작품 관계를 넘어 작품과 관객의 관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라깡 식으로 말하자면 시선은 관객(주체)의 것인 반면, 응시는 대상의 것이다. 따라서 그 둘은 일치할 수 없다. 말하자면 관객(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관객(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고 말이다.
지나가면서 단편적이나마 살펴보았듯이 김미라는 구작 ‘시녀들’에 다른 이미지들(사진과 영상)과 교차 편집해 놓았다. 와이? 왜 그녀는 신작을 구작과 일종의 ‘B컷’ 이미지들로 재구성한 것일까? 혹 그녀는 구작에서 ‘2%’ 부족함을 느꼈던 것일까? 혹 그녀는 자신이 표현한 것이 진정 그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의 신작 ‘엔터테이너’는 구작 ‘시녀들’의 결여를 메우는 작품이란 말인가?
이 점을 언급하기위해서라도 이번 복합문화지구 누에 레지던시 결과보고전 <상전벽해>에 전시될 김미라의 또 다른 작품들을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김미라는 ‘최종적으로 영상과 함께 오브제 및 드로잉을 공간에 설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트플러그 성북의 다양한 전시공간을 활용하여 여러 공간에 설치적 실험을 해 볼 예정이란다.
아트플러그 성북의 전시공간은 크게 3곳이다. 김미라는 영상작품 ‘엔터테이너’를 제1도원인 암실 공간에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전시공간에는 여타의 전시공간과 달리 전시공간 바깥의 숲속 풍경이 보이는 창문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관객에게 영상작품과 함께 창문을 통해 바깥의 숲속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단다. 김미라는 그녀의 ‘오브제’와 ‘드로잉’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작품 외부에는 녹색 간판(제 방에 있었던)을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공간에 실제 자연물(그런데 이것은 흔한 나무나 돌이 아니라, 제가 길가다 만나거나 직접 접촉했던 것들로 구성하려합니다. 예를 들면, 사과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농장에서의 경험이나, 기르는 반려견의 털 같은 것으로요.) 그리고 영상에 나오는 장면들을 활용해서 프린트된 종이나 사물을 중간에 함께 툭 놓는 설치와 함께 모니터 영상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김미라의 신작 ‘엔터테이너’와 오브제 그리고 드로잉은 서로 문맥을 이루지 못하는 엉뚱한 조합처럼 느껴진다. 왜 그녀는 엉뚱한 조합을 구성하는 것일까? 지나가면서 단편적이나마 살펴보았듯이 김미라의 신작 영상작품 ‘엔터테이너’는 구작 ‘시녀들’에 일종의 ‘B컷’ 이미지들로 ‘재구성(reterritorialisation)’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신작은 구작의 반복(repetition)과 차이(difference)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구작 ‘시녀들’이 유기체적인 편집으로 부른다면, 신작 ‘엔터테이너’는 유기체에 반하는 분열적인 편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득 들뢰즈(Gilles Deleuze)의 ‘기관-없는-신체(corps-sans-organs)’가 떠오른다. 그것은 기관들 자체에 대립하기위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기관들의 ‘유기체적인 시스템’에 대립하기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미라의 신작 ‘엔터테이너’는 숲속에서 시간대를 따라 촬영한 것을 편집한 ‘시녀들’에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녀의 신작은 일정한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시녀들’이 라깡의 '결핍으로서의 욕망'을 모델로 삼은 작업이라면, 그녀의 ‘엔터테이너’는 들뢰즈의 '생산으로서의 욕망'을 모델로 삼은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미라의 신작 영상작품 ‘엔터테이너’는 미친 듯이 무(無)규정적인 것이 생성된다. 따라서 그 생성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성은 특정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그리고 대상과 주체(관객/작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생성은 ‘편집(agencement)’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김미라는 현실에서 조우할 수 없는 ‘실재’를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미끼(lure)’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미끼’가 다름아닌 ‘엔터테이너’의 예능(작품)이라는 점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엔터테이너’는 대중에게 예능을 통해서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아티스트’ 김미라는 스스로를 ‘연예인’ 김미라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그녀는 대중(관객)에게 ‘엔터테이너’의 예능(영상작품)을 통해서 ‘오락’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말이다. 머시라? 김미라가 ‘고상한’ 작품이 아니라 ‘오락’을 제공하는 작품을 지향한다고요? 와이? 왜 그녀는 관객에게 ‘고상함’이 아닌 ‘오락’을 제공하고자 자처한 것일까? 그것은 관객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뒤돌아서고자 할 때, 즉 작품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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