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 Kim

어느 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불확실한 (감각의)세계를 휘젓기

김미정(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앱을 누르고 유명하다는 빵집을 찾아 유명하다는 빵을 샀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며 SNS에서 보고 읽은 것과는 맛이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문득 ‘느꼈다’는 판단의 기준이 정해져있음을 깨달았다. 사전에 접한 정보의 내용과 나의 경험 사이의 괴리를 자각하고 있음에도 이것이 옳은지를 검열하고 있던 것이다.

글의 서두를 엉뚱하게 시작했지만 사실 이 깨달음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으며 그렇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말 할 수도 없다. 2020년을 맞이한 현대인이 디지털 디바이스와 디지털 이미지에서 얻은 정보로 세계를 살아간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형태는 수용자에게 습득이 용이한 형태로 몸을 바꾸어 나간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동영상(무빙 이미지)으로의 변화처럼 말이다. 특히 최근 동영상으로 제작된 정보에 접속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네이버, 다음 등의 포털들은 이제 블로그보다 브이로그(video log)를 검색창에 상위랭크하기 시작했다. 문자언어를 통해 상상할 수 있던 기회가 영상이미지로 발 빠르게 치환되면서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내가 궁금했던 것들이 스크린에 띄워진다.

변화된 경험과 그 지각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레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떠올리게 한다. 벤야민은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적 공간이 되어버린 (대)도시를 지각하는 방식이 달라짐과 동시에 충격기술과 대중매체의 발전으로 경험과 체험의 변경된 의미를 강조한다. 더불어 인간 지각을 역사적으로 조직되는 매체와 함께 변화되는 것으로 전제하며 근대의 산물인 ‘충격이미지’와 함께 오늘날까지 미디어의 형식과 매체를 바꾸어가면서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매체에 따라 지각이 변화한다는 문장은 재생되는 정보를 마치 나의 경험처럼 체화시키는 작금의 상태에 적합한 분석이며, 더 나아가 작금의 경험은 카메라 혹은 스마트폰으로 기록하고, SNS등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누군가에게 공개해야만 비로소 진정성과 등가로 성립된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의 양은 팽창한다. 데이터화된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험을 쌓는 게 가능한 세상이 되면서 많은 이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과 스크린을 통한 간접 경험을 부지런히 혼동한다. 그렇게 스크린의 안과 밖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김미라 작가는 영상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스크린을 통해 감각을 습득하는 이 ‘당연한’ 변화와 그 확신에 섣불리 다가가기를 망설이는 듯 보인다. 여러 국가와 지역의 다층적인 문화와 장소를 경험한 작가의 정체성과 기억은 혼종적일 것이다. 한국에서 뉴욕 풍경의 조각을 발견하고, 뉴욕에서 일본의 흔적을 떠올리며 ‘~같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할지도 모른다. 사실 초연결시대의 영상매체가 적극적으로 영상 이미지를 통한 감각의 실재에 관여하거나 대신하고, 정보의 팽창과 감각의 둔화가 비례하면서 ‘~같다’는 특별한 고려 없이 사용되는 상용구가 되었다.

이에 김미라는 변화된 ‘감각(sense)’에 대한 탐구와 질문, 실험을 담은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때문에 이 글은 감각을 다루는 작가의 두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The Sense And Its Double>(2018)은 ‘나는 감각을 통해 세계와 소통한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작품이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사라진 바다, 즉 갯벌을 걸으며 작가는 상실된 바다를 떠올렸다. 여기서 갯벌은 안개로, 통통 튀어 오르는 지점토의 형상은 태양으로, 모래의 결은 파도로 변환된다. 이들은 단일 사물이 아닌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즉 ‘~같은’ 이미지로 은유된다. 재생되는 대상의 상관관계를 결부시키는 것은 대상의 사회적 기호가 아닌 이미지 자체의 시각적 연계성이거나 혹은 그 대상을 감각했던 기억의 서사이다. 그래서 <The Sense And Its Double>는 마치 무의식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지점토로 만들어진 정육면체는 이 세계의 주체를 대변한다. 디지털 콜라주의 레이어 아래 변형되어 새로운 신체를 일시적으로 가졌다가 지워지고, 손으로 짓이겨져 끈적한 소리를 내는 지점토와 스크린을 향해 인사하는 인물의 레이어가 겹치는 장면은 영상의 화자(아마 작가일 것이라 추측한다)가 현실과 꿈(가상)의 관계와 통제받지 않는 몸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부분과 연결된다. 투명해진 신체를 즐기며 여러 옷을 갈아 끼우지만, “세계가 사라진 것일까, 내가 사라진 것일까”, “그런데 과연 내가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라는 회의적인 문장들은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처럼 정의되는 세계 안에서 신체에 지각되는 한계와 의심, 혼란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심과 함께 분절된 컷들의 등장은 <When you fold my fingers>(2019)에도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종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종이의 역사나 역할을 분석하기보다 종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실험하는데 더 가깝다. 영상은 “이것은 중요하다/아주 중요하다”라는, 결국 같은 뜻을 가진 몇 개의 문장이 그 의미의 강조가 무색하게 깨끗이 지워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장면에는 앞서 <The Sense And Its Double>처럼, 어떤 사물의 특성을 떠올리게 하는 사운드와 그 사물을 은유하는 형태가 등장하는데, 종이로 만든 새와 잡지의 광고사진으로 만든 콜라주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포장지에 박힌 반짝이는 무늬가 물방울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The Sense And Its Double>과 다른 점이 있다면 디지털과 디지털이 아닌 이미지 사이를 흔드는 제스처가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하듯 움직이면 몇 개의 레이어가 형성되지만 이들은 콜라주 되다 다시 파편화되며, 찢겨져 노출된 그 막 뒤에는 크로마키 천 혹은 스톱애니메이션을 촬영하기 위해 제작된 세트가 드러나 이 곳이 ‘만들어진’ 공간임을 인지하게 한다. 이는 포장지 위에 콜라주 되어 발랄하게 움직이는 사물들이 그저 인쇄된 포장지에 불과함을 밝히는 손이 등장해 종이새로 접어버리는 장면과도 연관된다. 영상을 구성하는 각 레이어들은 <The Sense Its Double>에서지점토의 해체를 반복했던 것처럼, 우리가 소비하고 스스로가 그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영상 속 세계가 가상도, 실재도 아닌 어떤 불완전한 경계에 놓여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시킨다.

두 작품은 모두 미디어 이미지가 대신하는 가공된 감각의 불확실성을 피력한다. 주목할 지점은 작가 자신이 영상매체에 익숙한 창작자임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고 디지털과 실사 사이에 어설프게 기워진 간극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여기서 ‘어설프다’는 매끈하게 구현된 디지털 이미지의 그것이 아닌, 작가가 직접 제작한 오브제나 사진, 세트를 촬영한 장면이 영상 안에서 오히려 평면화되면서 발생하는 모호함을 일컫는다.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제작된 거친 이미지가 도리어 위태롭게 느껴지는 지금, 작가는 이러한 일종의 형식 실험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초실감적 체험이 구현하는 기술이미지의 현전과 아날로그적 방식을 충돌시켜 무의식 내 존재하던 감각을 끌어낸다. 그래서 두 작품에서 느끼게 되는 혼란스러움은 그 이미지가 낯설어서가 아니라, 실사와 가상공간 사이에 중첩된 이미지-레이어의 유약함 때문일 것이다. 데이터화된 세계는 오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듯 보이지만 손을 대는 대로 모양을 바꾸는 지점토의 물성처럼 이 곳과 저 곳의 인상과 기억을 빠르게 섞어버린다. 이는 다원성이 아닌, 마치 모래가 손에서 빠져나가듯 얼버무려지는 감각의 불투명함으로 번역된다. 작가는 이러한 지점을 인지하고 자신의 이미지-레이어들을 활용하여, 스크린 안팎에서 상실되거나 대체되었던 기억의 조각을 환기하는 초현실적이고 공감각적 공간을 빚어낸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 안에서 보이는 것이 명확할수록, 그 두께가 견고하지 않으며 도리어 섬약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이 글의 제목은 <The Sense And Its Double>에 등장하는 내레이션과 <When you fold my fingers>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를 지워버리는 장면에서 차용한 것이다. 작품에서 ‘이것’은 무엇인지, 그 문장은 왜 지워져야 했는지를 쉬이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문장은 사라져버렸다. 그 주어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원하는 대로 어디든 접속할 수 있는 스크린 속에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볼 수 없는 건 무엇일지를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그렇게 김미라의 작업은 미디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당신에게 스스로의 감각을 돌아보기를 권한다. 때문에 <The Sense And Its Double>의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그런데 나는 존재하긴 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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